「몰라도 돼! 그런데..」- 영화 '매트릭스', '사이퍼' by 스뫈

 

‘매트릭스’, ‘사이퍼’

 

 영화 ‘매트릭스’, 굉장한 흥행영화다. 다종다양한 함의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영화이기에,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이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아마 이미 생산된 여러 담론들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어때? 나는 논문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픈 말을 하기 위해 이 영화를 도구로 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다종다양한 함의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다양한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해석과 이해가 가능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매트릭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영화 속 인물인 ‘사이퍼’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 영화 내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인 ‘네오’는, 스스로가 실재라고 믿어왔던 세계가 ‘매트릭스’임을 깨닫고 진정한 ‘실재의 사막’, ‘매트릭스’의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서사의 장착은, 이 영화 전체의 중심 태도를 ‘계몽주의’로 정향하는 듯 보인다. ‘사이퍼’라는 인물의 위치가 독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영화 전체의 중심 태도와의 비교 속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이퍼’는 ‘실재의 사막’에서의 생활에 엄청난 염증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그는 네오’와 달리, 진정한 실재의 세계에서 다시금 ‘매트릭스’ 내부로 들어가길 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주죠."


 그는 이미 계몽되어 있다. ‘매트릭스’의 가상을 가상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자신의 ‘계몽’을 거부한다.


“모르는 게 약이다.”


 이러한 ‘사이퍼’의 입장과 이에 기반한 결단은, 단지 ‘네오’가 겪어야 되는 고난을 예비하는 도구적인 서사적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영화 전체의 중심 태도라 불릴만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격이다. 실제로 영화 내부의 이야기 속에서, ‘사이퍼’의 주장은 동일한 차원의 논의에서 반박되어지지 못한다. 그는 죽지만, 그의 주장은 영화 전체의 당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균열 내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어떤 의문들을 건져낼 수 있다.


‘왜 알아야만 할까? 대체 왜 모르면 안 될까? 앎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대체 그 앎은 무슨 소용인가? 앎과 행복 중에 무엇이 더욱 중요한가? 앎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행복해야만 하는가?....’


 이 균열 속에, 철학의 지루하지만 고전적인 의문들이 샘솟는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영화 ‘매트릭스’의 후속편들은, 앞에서 언급한 영화 전체의 당위로서의 ‘계몽주의’적 태도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러한 의문들은 한층 더 명징성을 띄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이것 하나다.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나는 ‘사이퍼’의 입장을 존중하고 싶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이퍼’들에게 말하고 싶다. ‘몰라도 돼!’ 그(들)의 판단은 그르지 않다. 나름의 근거를 가지며, 인정할 만하다. 그 개인이 ‘앎’과 ‘행복’의 문제 사이에서 무엇에 방점을 찍는가-하는 것은, 정말로 사적인 결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화 속에서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시퀀스는 매우 흥미롭지 않은가? 분명히 ‘사이퍼’도 이러한 선택에 따라서 ‘모피어스’ 일행과 합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몰라도 돼’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이다. 이는 ‘몰라야만 한다’라는 의무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정도로 적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의미의 진술은 별 의미가 없는 진술이다. 하나마나 한 말이다. 단지 이는 ‘계몽주의’-‘알아야만 한다’-에 대한 방어적 성격의 진술일 뿐이다. 곧, 이 말은 주도적인 위치에서 누군가에게 강요하기 위해 쓰이는 당위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어떤 다른 당위에 응해서만 쓰일 수 있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사이퍼’라는 인물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판단에 입각해서 일련의 행동을 취한다. 그는 매트릭스에 다시금 돌아가기 위해서, 보안요원과 뒷거래를 하고 ‘네오’와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네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 순간 불시의 공격을 받고 죽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사이퍼’의 운명에서, ‘몰라도 돼’에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당위를 언급하고 싶다.


‘그런데..’


 ‘사이퍼’는 죽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이다. 그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판단에 입각해서, ‘네오’와 일행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행동에 대한 응당한 결과였다. 여기서 우리는 ‘몰라도 돼!’라는 말에 ‘그런데’라는 단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몰라도 돼’라는 말은 다른 당위-‘알아야만 한다-에 응해서만 쓰일 수 있는 주장이다. 이는 누군가에 대한 강요 혹은 당위로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몰라도 돼‘라는 진술이 담고 있는 의미와 이에 기반한 태도에서 추론되는 명징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할 때, 우리는 어떤 당위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알기를 거부한 자들 혹은 ’몰라도 돼!‘라는 주장에 다다른 이들, 즉 ’사이퍼‘들은 자신들이 알기를 거부한 특정 대상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있는 발언권도 지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의 ’사이퍼‘의 죽음은, 이러한 당위에 대한 은유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과격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사이퍼’의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판단은 존중받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기반해서 그가 행한 행동은 과잉이었다. ‘몰라도 되는’ 그는, ‘알기를 원하는’ 그들을 방해할 어떠한 권한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사이퍼’는 자신이 모르기로 선택한 대상과 관련한 어떠한 맥락에 있어서도 ‘네오’ 일행들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구구절절, 영화 ‘매트릭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다음의 문장이다.


‘당신네들, 정말 몰라도 돼! 그런데, 나는 정말 단지 당신네들이

 그 태도에 걸맞는 말과 행동을 취하기를 바랄 뿐이야!’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현우, 자음과 모음 by 스뫈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사랑의 선택자체가 이미 폭력')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중에서' p.65

- '사랑해'라고 말해야 될 때마다 느껴지는 불편함.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저항해야만 하는 유혹이다. 이처럼 선택의 자명함이 명백한 순간이야말로 속임수가 완전한 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힘을 내어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상황의 배경에 대해 성찰해봐야한다.("실재의 사막", 79쪽)'p.98

- 난 '성찰'이라는 단어가 좋다. 막연함이라는 약점을 지니기는 하지만, 언제나 지향할만한 무엇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물음에 답변하기보다는 그 물음 자체를 걷어차야 한다.

'다시, 라캉적 의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이 자신의 욕망이 가져올 결과와 완전하게 마주하지 못하는, 혹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주체의 상태에 의존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주체가 자기 욕망의 즉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실재의 사막", 89쪽) 즉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체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p.104

- 행복 또한 고민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현재, 노력 혹은 희생을 '행복'이라는 목적 아래 작동하는 무엇으로 정당화하는 말들.. 그건 비정상이다.


혼자 아시아프 가서, 있어 보이려고 찍은 것들. by 스뫈






첫번째 그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제목은 안 찍었네.

- by 스뫈

- 내가, 나의 일에 관해서 쓴 글들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글 뿐만이 아니다. 입에서 쏟아낸 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오래되었다. 이런 현상 혹은 느낌을 겪지 않는 이들이 있으려나? 그런데 이상한 건, 나는 다른 이들의 일상적 이야기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의 것은 누군가에게 편안함을 주려나?
- 편안함을 준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 누군가는 말한다.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그 누군가는 '불편'을 편안하게 소비한다. 불편함 아래에서 편안함을 얻는다. '불편'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내 얘기다.
- 아마도 진정한 '불편'이란, 단지 편안함을 거부한다고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정으로 거부된 것에서, '불편'의 대상은 숨어있다. 쉬이 말해지지 못하는 곳에 있다. 

- 항상 결여는 있다. 나 스스로는 그 결여를 메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누군가의 결여를 조금이나마 메워줄 수 있을 지 모른다. 결론. 나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결여를 메워주어야 한다. 그게 주어진 단 하나의 방법인 듯 하다. 돌고 돌아, 누군가가 우연히도 그리고 잠시나마 나의 결여를 메워주기를. 
- 덩어리였다가, 하나가 되니 이런 것들을 소망하네.(기계 속의 부품이 되고 싶다고 떠벌이던 나의 이야기도 이런 소망과 같은 맥락에 있던 거였나?) 금지는 욕망을 만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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